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쓰시마 해전 (문단 편집) === 이동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ttle_of_Japan_Sea_%28Route_of_Baltic_Fleet%29_NT.png]] [youtube(WQLe53v-6gk)] 미카사 기념관에서 제공하는 발트 함대의 여정 영상. 결론부터 말하자면 레알 [[세계일주]]였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어서 [[스웨덴]] → [[노르웨이]]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모로코]] → [[세네갈|프랑스령 말리]] → [[가봉]] → [[나미비아|독일령 나미비아]] → [[남아프리카공화국|네덜란드령 남아프리카]] → [[마다가스카르]] → [[스리랑카|영국령 실론 섬]] → [[말레이시아]] → [[베트남|프랑스령 베트남]] →[[필리핀|미국령 필리핀]] → [[타이완 섬]] → [[중국|청나라]] → [[대한민국|대한제국]]에 이르는 엄청난 대장정을 해야만 했다. 1904년 10월 14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의 리바우 항에서 출발한 제2태평양 함대가 마침내 10월 15일, 크론 슈타트 해군기지를 떠나 일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차르는 로제스트벤스키에게 노후함들을 수리하여 제3태평양 함대를 편성해 증원시킬 것을 약속했고, 이후 이 함대가 합류했을 때 제2태평양 함대의 총 전력은 [[전함]] 7척, [[순양함]] 7척, 보조순양함 5척, [[구축함]] 9척등 총 28척의 전투함과 26척의 수송함 그리고 승무원 14,000명으로, 당대의 대함대였다. 하지만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대형 사고를 치는데, 11월에 [[도거 뱅크|도거 뱅크 해역]]에서 발트 함대가 엄한 어선단에 포격을 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당시 러시아 첩보기구에는 일본군 [[어뢰정]]이 유럽에 도착해서 함대의 주요 행선지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할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온 상태였다. 일본 해군의 어뢰정에게는 단독으론 유럽까지 갈 능력이 없었으니 당연히 헛소리였으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러시아 함대는 극히 조심스러워했고, 결국 [[북해]]에서 물고기 잡고 있던 영국 어선들에게 쾅! 거기다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는 야간이어서 함정식별이 어두웠고, 하필이면 어선의 기동이 영락없이 어뢰정에 의한 전함 측면 뇌격 시도와 흡사했기 때문에 오해할만 했다. 이 때문에 외교문제가 발생하였으나, 그 외에는 별 일 없이 항해했다. 이후 스페인의 비고에서 함대가 나뉘어진다. 이후 이동은 나름 순조로워 함대는 11월 6일 탕헤르를 통과, 11월 12일 프랑스령 다카르(1960년 독립한 [[세네갈]]의 수도)에 도착하여 보급을 마친 후 계속 항해하여 12월 1일 리브르빌, 12월 초중순에 그레이트피시만과 뤼데리츠를 거쳐 '''12월 29일''' [[마다가스카르]] 인근의 생트마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1905년 '''3월 16일''', 함대는 '''생트마리 인근'''의 노지베 섬에서 출발한다. 즉,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고작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까지 무려 '''두달 반'''이나 걸렸단 소린데, 배후에는 뒷사정이 있었다. 사실 노지베에 도착한 것은 1월 초순이였으며, 함대는 이곳에서 [[뤼순]]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비보를 들었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발트 함대는 이곳에서 2개월 동안 발목을 잡히게 되는데, 그 원인은 연료 보급 문제였다. 제2태평양 함대는 독일의 함부르크-아메리카 석탄선(하팍로이드)과 전속 계약을 맺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계약이 노지베 섬에서 만료되었다. 그러나 [[독일]]이 계약 연장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옴으로써, 함대는 계약이 체결될 2개월 동안 꼼짝없이 발이 묶이고 만 것이다. 열대의 더위와 익숙하지 않은 음식, 그리고 풍토병과 맞서 싸우던 함대의 장병들에게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였다. 우여곡적 끝에 노지베를 출발한 함대는 뒤이어 분견대와 합류하여 4월 8일에 [[말라카 해협]]에 도달했고, 4월 14일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의 깜란항에 도착해 다시 석탄 등을 보급받았다. 5월 9일에는 제3태평양 함대와 합류하여 총 38척으로 늘어났으며, 깜란항에서 98km 북쪽에 있는 반퐁 항에 다시 기항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상철|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 지구를 반바퀴 돌아올 때까지 탈락한 함선이 하나도 없었다는 이유로 로제스트벤스키에 대한 인정은 세계적으로 매우 높았다고 한다. 러시아를 견제하던 영국이 발트 함대의 수에즈 운하 통행을 거부함에 따라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가는 수개월의 여정을 해야 했고, 결국 진이 빠져 [[쓰시마 해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오해로, 영국의 견제가 아닌 '''러시아 해군이 보유한 전함의 실제 [[흘수선]]이 [[수에즈 운하]]의 당시 통항 제한 수심보다 깊었기 때문에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 추가로 파견된 러시아 군함들은 규모가 작아서 수에즈 운하를 잘 통과했다. [* 당시 영국 역시 러시아의 대함대가 어차피 수에즈를 통과못하니 희망봉찍고 돌아갈 것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어서 별다른 대책을 세우거나 하지도 않았다. 다만 수에즈를 통과하는 작은 러시아 군함들에게 여러가지 절차를 따지며 묶어두기는 했으나 당시 수에즈는 영국의 영토가 아닌 이집트 정부의 영토로 국제법상 인정되었기 때문에 러시아 해군측에서 이집트 정부는 어딨냐고 생떼를 쓰는 바람에 분견대를 보내주었다. 어쨌든 영국으로서도 러시아 해군 분견대의 발을 묶는데 어느 정도 일조를 한 셈.] 또한 '''일본 해군 역시도 보유한 전함이 대부분 영국제였는데 역시 선체 규격이 수에즈 운하의 규격보다 커서 일본으로 회항할 때는 희망봉을 통과해야 했다'''.[* 당시 일본의 해군함선들은 대부분 영국제였으니 구입시기가 좀만 늦었으면 러시아 해군에게 구매한 영국제 배가 끔살당했을수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